Planetarium 후기... 타키온.
Planetarium을 아십니까 ?
둥근 천정 아래 거의 누울수 있을 정도로 젖혀지는 의자에 기대어
때로는 신비스러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나직한 narration...
어두운 실내의 그 공간의 하늘에는 별들이 있는 밤하늘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원구의 밑부분 원호를 따라 그려져 있는
국민학교 (난... 국민학교를 나왔으니까...) 교과서의 어느 겨울 장면에
그려져 있던 조그마한 집들이 더욱 정겨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마 4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겁니다.) 남은 인상을 대학교에 와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재현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감흥은 여전하더군요. 누구의 말대로 우리는 별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별을 고향으로 그리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스 코드가 날아가서 봄과 겨울의 별자리 일부만 완성된 그 미완의 매력까지.
여기 저기 이 글을 올려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무한'한 공간속에 흩어져
의미가 부여된, 아마도 그리 되어야 하기에 그러한 밤하늘을 보면서...
이 글이 수필이 될 수 있을까 ?
공간과 패러다임... 그리고 요소로서의 인간.
한때 유행했던 가요 중에 '그대안의 블루'라는 노래가 있었다. 그리고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무선 호출기 '삐삐'중에는 '타키온'이라는 상표를 가진 것이 있다.
혹, 이 두가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어쩌면 대단히 문학적이고, 애상에 젖은, 혹은 어떤면에서는 또한 대단히 철학적인
인상이 그 둘의 연관 관계속에 숨어 있다.
'타키온'이라는 입자는 가상입자이다. 과학에서는 때로는 이론상으로 먼저 예측되어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세계('입자'를 포함하여)가 적지 않다. 특히 그것을 예측하는
이론 자체가 그 현실성을 실증하기 어려운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을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타키온'이라는 입자도 그러하다.
지금의 우주는 아인시타인의, 그 이론의 명확함이 의심되어 지기는 하고 있지만,
특수, 일반 상대성원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우주를 제한하는 절대적인 요소로서 빛의 속도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단서가 하나 붙는다면 그것은 freespace, 즉, 자유 공간 (진공)에서라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앞서 말한 두 이름의 공통점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
우주는 빛의 속도로서 꽉 짜여져 있다. 모든 희망도, 바람도, 그 모든 정보 전달의 매체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빛의 속도 이상으로 전달되어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태양을 잃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8분 이전에는 그것을 알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
태양의 햇살은 (지구의 우리에게서 반사되어 우주로 날아가는 빛은) 지금쯤 태양을 중심으로
약 18-30여 광년의 광구(光球)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안에서만
우리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 즉, 안드로메다와 우리 은하계는 아직도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상관없이 서로의 존재를 공유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빛의 속도는 또한 3+1 차원의 또다른 Space를 이루는 축을 이루는 시간과도 관련이 있다.
적어도 3차원에서는 나머지 3개의 축과는 달리 이 시간의 축은 -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간을 역전할 수가 없다. 적어도 상대성 이론하에서는.
그 이유는 이 수식을 보면 대단히 간단히 설명된다.
XS = XM * Root (1- {v^2 over c^2))
(XS : 정지 길이, XM : 운동 길이)
MM = Ms / (Root (1- (v^2 over c^2))
(MS : 정지 질량, MM : 운동 질량)
이 두 수식을 살펴보면, 광속에 접근할수록 진행 방향에 대한 길이는 0에 움직이는 물질의
질량은 무한대에 접근함을 알수 있다. 이와 유사한 방정식으로 이동 물체에서 시간은
무한대로 접근한다. 즉, 종합해 본다면, 광속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질량이 0가 아닌 경우,
길이는 0, 질량은 무한대, 시간은 정지상태가 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그 물체는 우리에게서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수식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러한 수식으로는 분모가 0인 순간을 지나가지 못한다.
동일한 수식으로 시간은 정지될지언정 역전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순간이나마 존재시킬수 있을까 ? 할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가장 근원적이고, 또한 대중적인 방정식이 하나 있다.
E=mc^2
속도가 무한대가 되기 위해서는 물체의 속력을 증가시켜주는 에너지가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무한정 질량으로 변환되어지게 되고, 따라서 이 에너지는 물체의 속도에 대한 기여도가 점차로 소실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 타키온(그리이스어로 '신속한'이라는 뜻)이라는 입자가 등장한다.(O.M 비러누크/E.C.G 스더전/제럴드 페인버그).
빛의 속도는 299,727.7 km/s 이다.
무게454g (1 pound), 길이 2.54 cm (1 inch)의 물체가 423,167 km로 달린다면 ?
이때 상대론적으로 측정되는 이 물체의 질량은 i pound, 길이 i inch가 된다. 즉, 유령이다.
허수의 질량과 길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세계가 타키온의 세계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수 없는 이 세계는 상대성 이론과 아무런 모순없이 병존할수 있다.
다만 한가지 이 세계의 특성은 질량이 우리를 +로 했을 경우, -의 성질, 즉, 척력을 작용한다는 것이 전제이다.
이것은 우주의 안정성을 위해 아인쉬타인에 의해 제시되었다 부정된 반중력(우주 상수)을 연상케 한다.
물론 요즈음 이 반중력이 다시 등장하고는 있지만.
타키온의 세계는 위의 두 방정식의 분모가 0가 되는 지점을 경계로 하여 우리와 정반대의 세계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세계에서는 에너지를 획득할수록 속도가 느려져서 가장 큰 에너지를 가진 입자는 광속에 접근하게 된다.
여기서 빛의 속도를 생각해 보자. 빛의 속도는 불변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인가 ? 아니다.
상대성이론에서 제시된 빛의 속도는 어디까지나 진공에서의 이론적 물리량이다.
실제적인 광자의 속도는 매질에 따라 틀려진다.
그 변위의 척도는 굴절지수이다. 굴절지수가 클수록 매질에서의 빛의 속도는 느려진다.
그러나, 그러한 매질하에서 질량을 가진 입자의 속도는 빛보다 빨라질수가 있다.
그 때, 입자에서는 묘한 일이 일어난다. 푸른색의 빛이 발생한다.
우리가 중수반응로를 찍은 사진에서 흔히 볼수 있는 그 Blue 말이다.
이 빛을 체렌코프 방사라고 한다. (파벨 A. 체렌코프/이리어 M. 프랑크/이고르 Y. 톰)
체렌코프 방사는 입자의 뒤로 음속돌파시 발생하는 마하콘과 같은 삼각뿔 모양이 발생하는데 삼각뿔의 각도가 입자의 속도에 따라 다르므로 고속 입자의 속도를 측정하는데 쓰일수 있다.
타키온은 공기나 진공중에서 이러한 체렌코프 방사를 일으킬수 있다.
이것은 또하나의 역설인데,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방사를 눈으로 확인할수 없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체렌코프 방사를 일으키는 타키온 입자는 우리의 지각 한계 밖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대단히 커다란 에너지를 가진 타키온이라면 아마도 관측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세계는 우리와 정반대의 시간이 흐를것이다. 가끔 타키온이라는 입자가 SF에 등장하는 (물론 아직 이 입자를 제대로 이해한 수준의 책은 본적이 없다. - 타키온이 이론으로 제대로 정립된 시기는 1967년으로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이유이다.
시간의 역전과 인과의 물림은 지금껏 상당한 매력을 가진 주제가아니었던가.
이 이야기를 정리할 때 인듯 하다. 여기서 체렌코프 방사를 일으키는 입자를 의인화 시켜 보도록 하자.
그는 엄청난 에너지를 통해 빛의 속도를 초월했다.
그러나 그것이 물리 법칙의 초월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그의 초월은 한계에 대한 접근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각의 의미는 아마도 진정한 'Blue'가 아닐른지.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가장 맑고 청아한 푸른 심경이 되어지지 않을런지.
우주는 우리에게 아직 끝이 없다. 그리고 소립자의 세계도 아직 끝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그것이 끝없는 세계에서의 지각이 전해주는 우리의 한계점이다.
전자공학은 현대 물리학의 총아이다. 마치 모든 기술적 향상의 첨단이 잡다하게 '의학'에 몰려있는 것처럼.
결국 모든 발전과 향상은 '인간'을 향해 그 지향점을 이루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그러한 중심부에서 자신의 '획득'을 이루어 오고 있었으며, 또한 이루어 갈 수 있을것인지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가.
역사는 큰 흐름을 가지고 있다. 공간도 역시 광대하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우리는 지적 편중의 함정에 빠져 매몰되어가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면, 그곳에는 물리 수식을 바탕으로 타키온이 달리고 있을런지 모른다.
별 하나 하나에는 그러한 항성계에 대한 천체 물리학적 역사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별들의 모여있는 궤적 하나 하나에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는 신화와 전설이 얽혀있다.
마침내 그러한 별자리를 만들어 내는 위치인 지구의 이 자리에는 자신의 세계를 꾸며갈수 있는 나 자신이 있다.
너무나 넓고, 너무나 찬연한 별자리에 어지러움을 느껴본 사람이 있는지.
어쩌면 그러한 경험은 섬뜩한 것이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주위를 둘러보라. 宇宙的 觀點에서 변화되고 있는 열역학 제2법칙의 진행과정을 돌이켜 볼필요가 있지 않은가.
지나치게 增大되어 버린 행성계의 에너지, 조절능력을 초과한 Entropy의 이상 증대가
바로 이러한 氣象異變과 무관하지는 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적인 順理의 (인위적인 순리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道學的인 접근을 이룬것을 높게 평가한다면) 因果的 인간 관계도 아마도 이러한 방식으로 自淨 능력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것이 지나친 剩餘 資本 때문이라면 곧, 주위의 모든 질서가 일시적으로 파괴되는것이 (그것이 人倫이든 혹은 사회질서이든, 공해에 찌들어버린 生態系이든, 이상 상태를 보이는 氣候系이든) 순리가 아닐른지.
모든 結節에 있어서 인간의 正當性을 주장한다는 것은 역시 되지도 않을 Cosmos를 위한 쓸데없는 엔트로피의 증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마치 surfriding과 같은 즐거움이 機會를 찾아 기다리는 곳인듯,
그것이 善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나서 말할수 있는가. 이미 人爲와 作爲에 中毒되어버린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한사람의 空間이 여기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演算子는 無意味하다.
space는 연산관계에 대해 닫혀 있어야 성립된다. 그것은 相對的 두 客體의 對話요, 討論이다.
그러한 관계안에서 공간은 확장되어가고, 상대적인 발전은 飛躍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치 AI에서의 知識, 狀態 空間처럼.
그러한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상대는 Cyber-space속의 가상의 세계로 沈潛되어 갈것이다.
별이야 있건 없건, Console에 나타난 세계는 3차원 공간으로, 그를 넘어 마침내 우리를 뒤덮을 것이다.
어쨌건, 저 어지러운 별빛속에 나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러한 視覺이 과연 얼마나의 共感을 誘導할지는 絶對-未知數임을 알고 있다.
다만, 이것은 아직까지 끊임없는 나의 提案이다. 쥬라기 공원에서의 아이언 말콤의 臺詞처럼,
'아직까지 우리는 스스로는 救援할수 있을지' 모를일이므로.
Paradigm의 너머에서는.
중학교때, (중공기가 넘어오던 날이었다) 반사식 천체망원경을 구입하여 처음으로 달 표면을 관측했던 일. 목성, 통성, 화성, 금성등을 관측했던 것, 목성의 위성과 토성의 테를 보았을때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
내게 있어서 별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의 실체를 느끼려 애썼다. 모든 부분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은 그러한 유기적 결합에 중요한 몇가지 맥을 만들어 놓았다.
사고하고, 감동하며, 나는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려고 적어도, 노력 하였다.
사람이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가. 누구는 소크라테스라 죽여버리고 누구는 소피스트라 매도한다.
대중은 충동당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며 변천하여 그에 속한 개인과 충돌한다. 아마도 그것이 역사일 것이다.
역시, 자신의 두 눈은 자신의 것이다. 혼동속에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우리는 아마도 생활의 철학이라 부를것이다.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에 어린이 회관 과학교실에 참가한적이 있었다.
그때 커다란 원형식 planetarium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내 옆에 만들어 놓고 싶었고,
이제 컴퓨터 language를 통해 조금이나마 실현해 보았다. 알지 못하는 세계의 무조건적인 모방은 생명이 없다.
프로그램의 upversion의 방향성은 보다 멋있고 나아진 '세계'이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의 계,
system을 구성하고 분석할 능력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또한 사회의 하나의 잘 길들여진 도구로서의 길도 기다리고 있다.
별을 바라보며, 그러한 우주를 내 안에 '그린'다. 그것이다.
비록 Blue일 지언정.
1996. planetarium program... 후기.